로마 DNA, 식민주의 폭력의 뿌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처절하게 외칩니다.
"유대인에게 눈이 없소? 손이 없소?... 우리를 찌르면 피가 나지 않소?"
하지만 그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샤일록은 결국 재산도 빼앗기고 기독교로 강제 개종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이 문학적 걸작으로 칭송받으면서도,
당시 유럽 사회에 팽배했던
인종 차별과 종교적 편견을 무비판적으로 투영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처럼 문학 작품에서조차 당연시되었던 차별과 탄압의 시선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기독교 중심의 유럽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 가한 수많은 해악의 단초를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가 남긴 '폭력의 DNA'가 어떻게 중세 십자군 전쟁의 광기로,
그리고 대항해시대 식민지 파괴로 이어졌는지
그 실증 사례를 통해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광기와 파괴
로마 멸망 후, 유럽은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는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타 문화에 대한 극도의 배타성과 무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지 회복"이라는 구호 아래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이러한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1-1. '성전(聖戰)'이라는 기만, 유대인과 이슬람을 향한 칼날
제1차 십자군(1096-1099) 원정대는 성지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그들의 야만성을 드러냈습니다.
라인강 유역의 마인츠, 보름스 등지에서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약 1만 2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하거나 강제로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마치 로마 제국이 피정복민에게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강요했던 역사의 반복과 같았습니다.
- 라인란트 학살(1096): 십자군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의 후예"라는 명목으로 유대인을 공격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강제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습니다.
- 예루살렘 함락(1099):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도시 내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당시 기록들은 도시가 피로 물들었다고 전합니다.

놀라운 유사점:
로마가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처럼,
십자군은 타 종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이는 로마가 남긴 정복과 지배의 DNA가
종교의 이름으로 되살아난 모습이었습니다.
1-2. 제4차 십자군의 배신: 콘스탄티노플 약탈
십자군의 타락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은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약탈입니다. 본래 이슬람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이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사주와 내부 권력 다툼에 휘말려,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도시를 무참히 약탈하며 수많은 성유물과 예술품을 파괴하거나 서유럽으로 가져갔습니다. 이 사건은 서유럽과 동방 정교회 세계 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 십자군 원정의 본질이 종교적 순수성보다는 세속적 욕망과 정치적 계산에 있었음을 드러냈습니다.
로마의 속주 착취 vs. 십자군의 약탈 경제
- 로마: 속주에서 거둔 막대한 세금과 자원으로 본국의 부를 유지 ➔ 속주민의 궁핍화와 반란 초래.
- 십자군: 성전 비용 명목의 과도한 세금 징수, 점령지에서의 무자비한 약탈 ➔ 유럽 농민층의 몰락과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 심화.
이러한 비교를 통해,
지배와 착취라는 로마적 시스템이
시대와 명분만 바뀌어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부: 대항해시대 – '신세계'를 파괴한 유럽의 탐욕
르네상스를 거치며 지리적 지식과 항해술이 발달하자,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대항해시대'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수많은 원주민에게는
문명 파괴와 대규모 학살, 그리고 끝없는 착취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각국의 식민지 경영 방식에는 놀라울 정도로
로마 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2-1. 에스파냐: 잉카와 아즈텍을 삼킨 '황금의 제국'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분열을 이용하고,
유럽에서 가져온 총기와 질병,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거대한 문명을 파괴했습니다.
- 포토시 은광의 비극: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에서는 수백만 명의 원주민이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채굴된 은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 가격혁명을 일으켰지만, 원주민에게는 '사람을 잡아먹는 산'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로마 시대 광산에서 노예들이 겪었던 참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 엔코미엔다 제도: 정복자에게 원주민에 대한 통치권과 노동력 징발권을 부여한 제도로, 사실상 합법화된 노예제였습니다. 로마의 라티푼디움(대농장) 경영과 유사한 착취 구조였습니다.


2-2. 영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 해 뜰 때부터 해 뜰 때까지 마르지 않는 수탈
영국은 인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식민 통치 방식은 교묘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세포이 항쟁(1857) 이후 직접 통치로 전환하며,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통해
민족 간, 종교 간 갈등을 조장하여 지배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아편을 통한 국가 침략(아편전쟁)을 보면
모든 못된 짓의 시작은 영국이 시작한 것이다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이는 로마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을 통치하며 사용했던 방식과 유사합니다.
또한, 인도의 면화와 아편을 강제로 재배하게 하여
자국의 산업혁명과 무역 적자 해소에 이용했습니다.
지배 방식 | 로마 제국 | 대영 제국 (인도) |
---|---|---|
분할 통치 | 피정복민족 간 경쟁 유도, 자치권 차등 부여 | 힌두-무슬림 갈등 조장, 카스트 제도 이용 |
경제적 수탈 | 속주로부터 곡물, 광물, 노예 징발 | 면화·아편 강제 재배, 토지세 과중 부과 |
군사적 통제 | 주둔군 파견, 도로망 건설로 신속한 군대 이동 | 세포이(용병) 활용, 철도 부설로 군사력 투사 |
위 표에서 보듯, 영국의 인도 통치 전략은
로마 제국의 속주 관리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지배층의 편의를 위해 피지배층을 분열시키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통치술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된 것입니다.
2-3. 벨기에와 콩고: 레오폴드 2세, 최악의 최악의 최악인 '피의 고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던 콩고 자유국(1885-1908)에서 자행된 만행은
식민지 착취의 잔혹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늦어져 끼어들 자리가 없던 레오폴드는
분열된 콩고를 자신의 땅으로 만들고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들의 손목을 자르는 형벌을 한 것입니다.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남자(은살라)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5살이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겠으나,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 이상 거머쥘 부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는 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남자와 여자들이,
같은 인류 형제자매이며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하느님의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어졌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러한 극악무도한 폭력은
로마 시대 검투사 경기나 십자가형처럼,
공포를 통해 복종을 강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통치 방식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콩고인이 학살과 질병, 기아로 사망했으며,
이는 '문명화'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유럽 제국주의의 탐욕과 야만성을 보여줍니다.
3부: 깨어지는 신화 – 유럽 우월주의의 허상

유럽 중심의 역사관은 오랫동안 로마의 유산을 계승한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서 드러난 지적 오만함,
대항해시대의 파괴적 탐욕은 이러한 '우월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줍니다.
중세 이슬람 세계는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유럽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중국의 발명품들은 유럽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유럽의 발전은 고립된 성취가 아니라,
타 문명과의 교류와 (때로는 폭력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복합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피지배 민족의 맞서 싸움
- 로마 시대: 유대인의 바르 코크바 항쟁,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 봉기 ➔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에 진압되었으나, 제국의 균열을 보여주는 저항.
- 식민지 시대: 인도의 세포이 항쟁, 아이티 혁명, 베트남의 독립운동 ➔ 제국주의 열강에 맞선 끈질긴 투쟁, 독립과 해방의 씨앗.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제국주의적 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피지배 민족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이 겪었던 부당함에서 시작하여, 십자군의 광기와 대항해시대의 식민지 파괴에 이르기까지, 유럽 역사의 이면에는 로마 제국이 남긴 정복과 지배, 그리고 폭력의 DNA가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외피와 '문명 전파'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는 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경제적 이득을 향한 끝없는 탐욕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유럽 역사가 우수하다"는 편견은 이러한 어두운 과거를 직시할 때 비로소 깨질 수 있습니다. 로마 멸망 후 중세와 근대 제국주의 시대를 관통하는 폭력의 근본적인 동인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과 갈등의 뿌리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로마의 야만성 : 유럽 '깡패 DNA' 역사적 기원 파헤치기
로마 야만성: 유럽 깡패 DNA의 기원 심층 탐구유럽 역사의 장대한 서사 이면에는 제국주의 시대부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반복된 야만성과 이기주의의 어두운 단면이 존재합니다.아프리
djjjangs.tistory.com
로마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DNA가 현대 사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다음 3편에서는 "제국주의의 검은 그림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중반 유럽과 미국의 추악함"이라는 주제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떻게 더욱 정교하고 대량화된 폭력과 학살을 가능하게 했는지
심층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