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변호사 노무현: 영화 '변호인'과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2025. 7. 2. 07:41문학 지식인

2025.06.30 - [문학 지식인] - 적국의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사'가 된 일본인, 후세 다쓰지

인권 변호사 노무현: 영화 "변호인"과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내가 가장 사랑했던 대통령, 그의 시작을 이야기하다

인권 변호사 연대기, 두 번째 장을 열며

지난 인권 변호사 시리즈 첫 글에 이어,

 

오늘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한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대통령으로서의 그가 아닌,

한 청년 변호사로서의 그를 만나보려 합니다.

그의 이름은 노무현입니다.

 

많은 이들이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을 기억하지만,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인 선택,

돈과 명예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시대의 아픔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 노무현'의 가장 빛나는 시작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 한 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위대한 선택의 순간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1980년대 초, 서슬 퍼런 시대의 공기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초는

말 그대로 공포가 일상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의 비극을 딛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 안정을 위해

사회 곳곳의 비판 목소리를 억압했습니다.

 

이때 정권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했던 도구가

바로 '용공조작 사건'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칼날처럼 휘둘러,

사회과학 서적을 함께 읽거나 시국을 비판하는 젊은이들을

'북한을 추종하는 반국가단체'로 둔갑시켜 탄압하는 방식이었죠.[3]

 

영화의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釜林事件)'은

결코 단독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산의 학림(學林)사건'이라는 뜻처럼,

이미 서울에서는 '학림사건', '무림사건' 등

유사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횃불회', 대전의 '한울회' 등

전국 각지에서 독서 모임이나 학생 운동 조직이

비슷한 혐의로 와해되었습니다.

 

이는 정권 차원에서 자행된 체계적인 탄압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때,

변호사가 '시국사건' 변론을 맡는다는 것이

단순한 법률 행위를 넘어,

국가 권력 전체에 맞서는

얼마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습니다.

 

II. 영화 속 송우석, 그리고 인간 노무현

돈 잘 버는 '속물' 변호사의 탄생

영화 "변호인"은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을

매우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냅니다.

상고 출신으로 빽도, 가방끈도 짧지만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세무 전문 변호사로 큰 성공을 거두죠.

 

동료들에게 "변호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부동산 등기 업무에 뛰어들어

돈을 벌고, 대기업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는

세속적인 성공의 화신입니다.

 

놀랍게도 이 모습은

실제 '인간 노무현'의 젊은 시절과 꼭 닮아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 대신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의 이력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인간극장입니다.

 

변호사 개업 후, 그는 실제로

조세 및 회계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부산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변호사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 요트 장면처럼, 실제로도 요트 클럽에 가입해

활동할 만큼 경제적 성공을 누렸습니다.

그의 초기 야망은 단순한 '속물근성'이 아니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기에 훗날 그가 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선택은,

자신의 피땀 어린 성공 신화 자체를 부정하는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결단이 됩니다.

인생의 전환점, 부림사건

영화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인생을 건 도박에

뛰어드는 계기는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7년 전, 떼먹었던 국밥값을 대신 내주며

정을 쌓았던 국밥집 아주머니(김영애 분)의 아들 진우(임시완 분)가

사건에 휘말리자, 그 빚을 갚기 위해

변호를 결심하는 것이죠.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감동적인 '국밥집 인연'은 사실 창작된 이야기입니다.

 

실제 노무현 변호사는 당시 부산 인권 변호의 대부였던

김광일 변호사의 권유로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시국 사건은 재미도 없고,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한다"며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요?

과거의 빚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참상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꽉 막혔다. 분노로 인해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통닭구이'라 불리는 잔혹한 고문으로

발톱이 빠져버린 학생의 발을 직접 본 순간,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적인 폭력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 참혹한 현실과의 조우야말로

안락한 삶에 안주하던 한 변호사의 영혼을 뒤흔든

진정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진실과 허구: 영화 '변호인' 파헤치기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극적 효과를 위해 여러 부분을 각색했습니다.

영화와 실제 역사의 차이점을 짚어보는 것은

'변호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영화적 설정 (Cinematic Fiction) 역사적 사실 (Historical Fact) & 그 이면의 의미
사건 계기: 국밥집 인연
송우석은 7년 전 신세 진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을 위해
사건을 맡는다.
사건 계기: 변호사로서의 소명
선배 변호사 김광일의 권유로 참여했으며
처음엔 주저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고문 피해자들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의미: 영화는 개인적 인연으로 감정 이입을 유도하지만,
실제로는 직업적, 인간적 양심의 각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동기였다.
핵심 증인: 양심선언 군의관
송우석은 고문 사실을 증언할
군의관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핵심 증인: 허구의 인물
양심선언을 한 군의관은 없었다.
이는 영화적 장치다. 다만 고문 후 치료를 해준
경찰병원 의사는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의미: 영화는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고
외부의 조력 없이 싸워야 했음을 보여준다.
결정적 증거: E.H. 카 신원조회서
영국 대사관 공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극적으로 증명한다.
결정적 증거: 없었던 장면
실제 법정에서는 없었던 장면이다.
노무현은 대신 책의 내용을 직접 읽고 분석하며
검찰 주장의 비논리성을 파고들었다.
의미: 영화는 한 방의 '사이다'를 보여주지만,
실제 변론은 더 집요한 논리 싸움이었다.
그의 성실함과 지적 투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론의 역할: 외신 기자들의 취재
외신 기자들이 법정에 들어와
재판을 취재하며 공안 당국을 압박한다.
언론의 역할: 간접적 보도
외신 기자들의 직접 취재는 없었다.
대신 피해자 가족이 쓴 글이
국제앰네스티를 통해 해외에 알려지며
외신 보도가 이뤄졌다.
의미: 권력의 감시가 아닌, 피해자 가족의
필사적인 저항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사실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99명의 변호인
부림사건 직후 구속된 송우석을 위해
부산 변호사 99명이 변호인으로 나선다.
클라이맥스의 진실: 1987년 이석규 열사 사건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시점이 다르다.
1981년 부림사건이 아닌, 6년 뒤인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 장례 투쟁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의 일이다.
의미: 99명의 지지는 부림사건 하나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6년간 그가 쉼 없이 투쟁하며 쌓아 올린
신뢰와 헌신의 결과물이었다.

 

법정 투쟁: "국가란 국민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은

단연 법정 씬들입니다.

특히 송우석 변호사가 포효하는 마지막 변론은

영화의 백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이 외침은 독재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헌법의 본질을 되묻는 우레와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실제 노무현 변호사의 법정 투쟁 역시

영화처럼 뜨거웠지만, 그 이면에는 치밀한 논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검찰이 '불온서적'으로 규정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 모든 책을

직접 구해 밤새워 읽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검찰 주장의 논리적 허구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법정에서의 모습은 변호인을 넘어 '동지'에 가까웠습니다.

피해자 고호석 씨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노무현 변호사님은 우리와 재판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와 한 편이었어요.

거의 공범 수준이 돼가지고 변론을 한 거지요" 

 

그는 부당한 발언에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때로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변론을 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 가족들 사이에서는

"노 변호사님 때문에 밉보여 형량을 더 받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에게 부림사건 변론이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III. 영화가 담지 못한 이야기: 거리의 변호사 노무현

부림사건, 그 후: 인권변호사의 탄생

부림사건은 노무현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훗날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의 궤도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돈과 성공을 좇지 않았습니다.

요트 클럽에도, 비싼 술집에도 발길을 끊었습니다.

 

대신 그는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인들이 권했던 책들을 탐독하며 사회과학적 인식을 넓혔고,

그의 변호사 사무실은 민주화 운동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광주 비디오'를 몰래 유통시키며

5.18의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던 일화는

그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억울한 사람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는 '계몽가'이자

민주주의의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B. 확장되는 투쟁의 전선: 부미방과 이석규

영화 "변호인"은 부림사건을 통해 각성한

송우석 변호사가 곧바로 정치적 탄압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실제 노무현의 길은

훨씬 더 길고 험난했습니다.

영화가 담지 못한 1981년 이후 7년은,

그가 '법정의 변호사'에서 '거리의 변호사'로 거듭나는

치열한 시간이었습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

부림사건 이듬해, 그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시국사건 변론에 뛰어듭니다.

광주 학살을 지원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부미방' 사건입니다.

그의 변론 요지였던 "처벌한다면 사랑의 매가 필요할 뿐이다"라는 말은,

학생들의 행위 저변에 깔린 애국적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석규 열사 사건:

1987년 6월 항쟁 당시 노무현은

부산 지역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그해, 거제 대우조선소에서 파업 시위 중이던

노동자 이석규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노무현 변호사는 한달음에 거제로 달려가

사건을 돕다가 노동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법정에 출석한 피고인 '송우석'과

그를 위해 끝도 없이 호명되던 변호인들의 장면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부산 지역 변호사 142명 중 무려 99명이

그의 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영화보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99명의 연대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온몸으로 쌓아 올린

신뢰와 헌신에 대한 동료 법조인들의 응답이었습니다.

 

IV. 결론: 변호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암흑기 속 등불: 인권변호사의 시대적 의미

노무현은 결코 외로운 섬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암흑기에는 그와 같이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싸운

소수의 인권변호사들이 있었습니다.

조영래, 홍남순, 이돈명, 황인철 같은 이들은

수감과 자격 정지의 위협을 무릅쓰고

민주화 운동가들과 양심수들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법정은 유일하게

진실을 외칠 수 있는 공개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 변론을 통해 고문의 실상을 폭로하고,

정권의 조작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불의한 권력에 법과 양심의 이름으로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으로

발전하며 한국 사회 공익 변론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법과 인권이라는 작은 등불을 꺼뜨리지 않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완전한 절망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낸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성남의 변호사, 이재명

한 시대의 투쟁은 다음 시대의 과제를 남깁니다.

1980년대 인권변호사들이 국가 폭력과 싸웠다면,

민주화 이후의 변호사들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든

불평등과 부조리와 싸워야 했습니다.

 

다음 인권 변호사 연대기에서는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에 감명받아

판검사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했던 한 청년.

 

그는 성남에서 노동자들의 해고 무효 소송을 무료로 변론하고,

시민들의 건강권을 위해 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이끌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그리고 이제는 우리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

다음 편에서는 '성남의 변호사' 이재명의 이야기를

깊이 파고들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