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민비와 민씨의 조선 수탈사
명성황후 민씨일가 만행과 민중봉기
지식아재SAY : "출근길에 명성황후 뮤지컬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명성황후? 이 네 글자는 저에게 아프게 느껴집니다. 무속에 나라 팔아먹은 여자, 권력유지를 위해 모든 다한 여자, 친인척 260명을 고위 관직에 넣고 나라를 농락한 여자. 네. 내란 수괴 범과 그 여자의 이야기랑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글을 적어봅니다."
조선 말기, 나라는 안팎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외세의 침탈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국정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은
백성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특히 명성황후(민비)와 그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 세력의 탐욕과 만행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고,
이는 결국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중 봉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의 파렴치한 행각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합니다.
민씨 정권의 끝없는 탐욕, 국가 재정을 파탄 내다
고종의 친정 이후 명성황후는
자신의 친인척인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안위나 백성의 삶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부귀영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관직 매매와 국고 횡령: 나라 전체가 그들의 금고
민씨 정권 하에서 매관매직(관직을 사고파는 행위)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관직이 결정되었고,
이렇게 관직을 산 자들은 투자한 돈을 회수하고
더 큰 이익을 남기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 민겸호의 부정축재:
-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민겸호(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는 대표적인 탐관오리였습니다. 부정축재와 전횡을 저지른 매국노입니다.
- 국고 탕진:
- 명성황후 자신도 사치스러운 생활과 잦은 궁궐 연회, 그리고 무속 신앙에 빠져 막대한 국가 재정을 낭비했습니다.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마저 민씨 일가의 사치와 유흥비로 흘러들어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성황후는 개인적인 용도로 금강산 일만이천봉 각 봉우리에 쌀 한 섬과 비단 한 필, 돈 천 냥씩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 이권 침탈:
- 민씨 척족들은 외국 세력과 결탁하여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등 국가의 주요 이권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막대한 뇌물을 챙겼습니다. 이는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고 외세의 경제적 침투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 차관 경제의 폐해: 프랑스에서 훔친 돈 1896년 차관 계약서 프랑스 은행 컨소시엄으로부터 300만 프랑(약 114만 원) 차입 조건: 연이자 6% + 인천 조계지 3만 평 임대 민비 측근의 유용 내역 전신선 부설 예산 60만 원 중 50만 원 반토막 민영익 → 종로구 계동 별장 건설에 30만 원 투입
"나라의 모든 이권은 민씨 문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었고, 벼슬자리 또한 민씨가 아니면 얻기 어려웠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어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 황현, 《매천야록》 중 (내용 각색)
참다못한 백성의 분노, 봉기로 폭발하다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끝없는 수탈은 백성들의 삶을 극한으로 내몰았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백성들은 결국 분노를 터뜨리며 봉기하기에 이릅니다.
임오군란(1882): 굶주린 군인들의 절규
임오군란은 단순한 군인들의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와 차별 대우에 대한 구식 군인들의 생존을 위한 절규였습니다.
- 13개월치 급료 체불: 군인들은 오랫동안 급료를 받지 못해 생계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썩은 쌀 지급: 어렵게 지급된 한 달치 급료마저 모래와 겨가 섞인 썩은 쌀이었습니다. 이는 군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습니다.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 민씨 정권에 대한 반감: 군인들의 분노는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척족 세력 전체를 향했습니다. 그들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궁궐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의 실정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청나라 군대의 개입을 불러와 조선의 자주성을 더욱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민비는 이 사건으로 잠시 권력에서 밀려났지만,
청의 도움으로 복귀한 후 더욱 노골적으로
민씨 세력을 중용하고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1894):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라, 민씨 정권의 폭정과 외세의 침탈에 맞선 반봉건·반외세 항쟁이었습니다.
- 삼정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곡식 대여 제도)의 문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민씨 정권 하에서 지방관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져 백성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은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과도한 물세를 징수하고, 아비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백성들에게 강제로 돈을 거두는 등 탐학을 일삼았습니다.
- 신분 차별과 사회 모순: 봉건적인 신분 질서와 사회 모순에 대한 불만도 컸습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 人乃天)'이라는 평등사상을 내세워 억압받던 농민과 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 외세 배격: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적 침탈과 국정 간섭에 대한 반감도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초기에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민씨 정권은 외세(청나라와 일본)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하려 했고, 결국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우금티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 과정은 청일전쟁 발발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조선은 더욱 깊은 외세의 간섭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역사의 심판: 민씨 정권의 몰락과 잊지 말아야 할 교훈
민씨 일가의 끝없는 탐욕과 국정 농단은 결국 조선의 국력을 극도로 쇠퇴시키고, 외세의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녀와 민씨 정권이 저지른 과오는 결코 미화될 수 없습니다.
- 지도층의 책임: 국가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음을 역사는 명확히 보여줍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권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 민중의 저항: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은 억압받는 민중들이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저항 정신은 이후 항일 의병 투쟁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 외세 의존의 위험성: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결국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깁니다. 민씨 정권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였고, 이는 국권 상실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조선 말기 민비와 민씨 일가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부정부패가 한 국가와 민족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불의에 맞선 민중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성황후(민비)와 민씨 일가의 행적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역사의 교훈을 통해 현재를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