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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검증! 뻥튀기 전쟁판 들여다 보기!(삼국지 분석 2탄)

지식아재 2025. 6. 1. 09:52

 

삼국지 대군, 진짜 그만큼? 팩트 체크 들어갑니다 

이번 2탄은 삼국지의 전쟁편입니다.  어릴 때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해서 관도대전, 적벽대전 같은 이야기들을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읽다 보면 "아니, 진짜로 병사가 그렇게나 많았다고?"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해요. 이번에는 바로 이 삼국지 전쟁 속 병력 이야기, 그 '뻥'의 실체를 좀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이문영 선생님의 책 《허구로 보는 역사》를 옆에 끼고 말이죠. 

1. 이야기의 시작: 삼국지 전쟁, 그 엄청난 숫자들의 비밀

《삼국지연의》 딱 펼치면 "황건적이 30만이다!", "원소 군대가 70만이나 몰려왔대!", "조조가 적벽으로 끌고 간 병사만 80만!" 이런 숫자들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지잖아요. 확실히 이런 묘사들이 이야기의 맛을 살리고 "와, 대단하다!" 싶게 만들긴 하죠. 그런데 이게 다 진짜 역사 속 이야기일까요? 일단 삼국지 전쟁 기록에 나오는 병사 수가 왜 그렇게 부풀려졌는지, 그리고 그 시절 후한 말기의 나라 살림이나 경제 상황, 또 사람들 관리 같은 걸 따져보면 실제로 얼마나 군대를 모을 수 있었을지 감이 좀 올 거예요. 이문영 선생님이 책에서 "과장된 만큼 그 시대 사람들이 힘들었다는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실마리 삼아서, 그냥 숫자만 따지는 걸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한번 들여다보죠!

2. 삼국지 병력,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소설과 역사 사이 줄타기

삼국지 전쟁 하면 으레 따라붙는 게 동원된 병사 수인데, 이게 참 소설이랑 실제 역사 기록이랑 차이가 커서 가끔은 뭐가 뭔지 헷갈릴 지경이에요. 예전에 제가 다른 글에서 '연의랑 정사 구분이 좀 애매한데요?' 하고 지적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엔 그 부분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면서 실제 기록들을 통해 허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건 뭐, 탐정이 된 기분이랄까요?

2.1. 《삼국지연의》의 '뻥튀기' vs 《정사 삼국지》의 담백함

나관중 아저씨가 쓴 《삼국지연의》는 역사 바탕에 작가님 상상력이 듬뿍 들어간 소설이고, 진수라는 분이 쓴 《정사 삼국지》는 그나마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들 하죠. 이 두 책에 나오는 병사 수를 비교해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예요.

  • 관도대전: 《연의》에선 원소군 70만, 조조군 7만이라지만, 《정사》 쪽 기록들을 잘 살펴보면 원소군은 한 10만에서 11만, 조조군은 2만에서 4만 정도로 보는 게 맞을 거예요. 확 줄죠?
  • 적벽대전: 《연의》에선 조조가 80만 대군을 끌고 갔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한 20만 명 안팎이었을 거라는 게 학자들 생각이에요. 주유랑 유비 연합군은 5만 명도 안 됐다고 하고요.
  • 이릉대전: 유비가 동오 치러 갈 때도 《연의》에선 70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실제로는 4~5만 명 정도였다고 하네요.

보시는 것처럼 《연의》의 병력은 《정사》보다 적게는 몇 배, 많게는 열 배도 넘게 부풀려져 있어요. 배송지라는 분이 《정사 삼국지》에 설명을 덧붙이면서 여러 자료를 인용했는데, 이걸 보면 당시 병력 기록이 얼마나 엉망이고 뻥이 심했는지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장판파에서 관우가 수백 척의 배를 끌고 나타났다는 묘사요? 그 시절에 배를 그렇게 많이 만들 능력이나 군사를 모을 여력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고개가 갸우뚱해져요.

만약에 말이죠, 어떤 연구팀이 (예를 들어 뭐, 남경대학교 군사고고학팀이라든가) 한나라 말기 쇠로 만든 무기 수천 점을 분석했다고 쳐봐요. 그래서 "야, 이거 보니까 옛날엔 칼 한 자루 만들 시간에 농기구 열다섯 개는 만들었겠는데?" 이런 결론이 나왔다면, 수십만 군대를 한꺼번에 무장시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지 딱 감이 오지 않나요? 이런 생산력의 한계만 봐도 《연의》의 묘사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병력을 부풀린 걸까요? 이문영 선생님은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과장된 숫자는 그 시절 사람들이 겪었던 전쟁의 공포, 그 끔찍함,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영웅에 대한 갈망과 강한 나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심리적 장치 같은 거다." 라고요. 그러니까 이 숫자의 뻥튀기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아픔과 희망을 담고 있는, 뭐랄까, 일종의 문화 코드 같은 거라는 거죠.

2.2. 진짜 모을 수 있는 군대는? 인구, 돈, 그리고 질병이라는 변수

수십만 대군을 움직이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과 물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후한 말기는 오랜 전쟁에다 전염병까지 겹쳐서 인구가 확 줄고 경제도 바닥을 친 상태였어요. '인구 추정이 틀렸네', '경제랑 군사 문제를 따로 생각하면 어떡하냐'는 지적을 받았던 부분을 중심으로, 당시의 그 팍팍했던 현실을 한번 들여다볼게요.

2.2.1. 텅 빈 호적: 줄어든 사람들과 마른 병력의 샘

《후한서》 〈군국지〉를 보면, 후한 중평 연간(그러니까 146년쯤) 인구가 대략 5,600만 명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 동안 전쟁에 전염병이 계속되면서, 삼국이 딱 세워질 무렵(220년쯤)에는 인구가 천만 명 아래로 뚝 떨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예요. 심지어 700만 명까지 줄었다는 연구도 있다니, 전체 인구의 80% 넘게 사라졌다는 거잖아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죠?

이렇게 사람이 줄어드니 당연히 군대에 보낼 사람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어요. 옛날에는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일정 비율을 넘기기가 어려웠거든요. 게다가 후한 말기에는 병, 특히 전염병이 돌면서 인구 감소를 더 부채질했어요. 어떤 의학 역사 연구를 보면, 당시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직접 싸우다 죽은 사람은 37%뿐이고, 나머지는 63%나 병(주로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 전투력 손실은 물론이고 뒤에서 먹을 걸 생산할 사람도 부족해지는 악순환이었던 거죠.

그때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병사 1명 먹이려면 농민 7명이 필요했다"고 해요. 전체 인구가 천만 명도 안 되는 상황에서 수십만 군대를 계속 유지하는 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예를 들어 20만 대군을 유지하려면 최소 140만 명의 농민이 필요하고, 이들을 포함한 총 부양 인구는 훨씬 더 커야 하니까요. 당시 인구 구조로는 어림도 없는 숫자였죠.

만약에, 유엔 인구기금(UNFPA) 같은 국제기구랑 역사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후한 말 인구 변화를 연구했다고 상상해봐요. (진짜 이런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재밌는 상상이잖아요?) 뭐, 도자기 조각 나온 양이나 집단 매장지 유골 분석 같은 걸로 특정 지역 인구가 최대 78%까지 줄었다는 걸 확인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이런 연구는 글로만 남은 기록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 사회의 충격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겠죠.

2.2.2. 바닥난 창고: 무너진 경제와 군수품 조달의 어려움

전쟁은 정말 돈 먹는 하마죠. 먹을 거, 무기, 군복, 말 같은 군수품을 대는 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냐 없냐를 결정짓는 문제예요. 그런데 후한 말기 경제 상황은 정말 말이 아니었어요.

  • 농사 망했어요: 계속된 전쟁으로 농사지을 땅은 황무지가 되고, 농민들은 흩어지거나 죽어서 농업 생산량이 뚝 떨어졌어요. 조조가 실시한 둔전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한 거였지만, 그 효과는 좀 제한적이었죠. 옛날 둔전 관련 기록을 보면, 둔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둔 것의 대부분을 군량으로 바쳐야 해서 살기가 아주 팍팍했다고 해요.
  • 택배 불가 지역이었을까요?: 길이나 물길 시설이 엉망이라 많은 양의 군수품을 멀리까지 옮기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특히 산이 많은 촉나라 같은 경우는, 북벌할 때 군량 옮기는 문제가 제갈량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죠. 만약 요즘처럼 엑셀 같은 걸로 당시 도로 사정이나 운송 수단을 넣고 계산해 본다면, 10만 대군이 하루 먹을 군량을 100km 이상 옮기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 돈이 돈이 아니야: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물물교환이 많아졌어요. 동탁이 찍어낸 불량 화폐 때문에 시장은 난리가 났고, 이런 경제 혼란은 군수품을 구하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었죠.

이렇게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물건 옮기기도 힘든 상황을 생각하면, 《연의》에 나오는 수십만 대군은 그야말로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였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몇만 명 규모의 병력 동원도 각 세력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거예요.

3. 허구는 왜 필요했을까? 이야기 속에 숨겨진 마음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뻔한 뻥이 오랫동안 사람들한테 먹히고 사랑받았을까요? 그냥 옛날 사람들이 순진해서? 아니면 그냥 재밌으니까?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이문영 선생님 분석처럼 그 뒤에는 좀 더 복잡한 이유들이 숨어있다고 봐야겠죠.

3.1. "우리 때는 말이야..." 과장은 아픔의 다른 표현일지도

이문영 선생님은 책 《허구로 보는 역사》에서 정말 흥미로운 주장을 하세요. 역사 기록 속에 나오는 과장의 정도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정신적 충격, 그러니까 트라우마의 깊이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을 겪고 나면 그 경험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후한 말기는 정말 끔찍한 시대였어요. 끝없는 전쟁, 학살, 굶주림, 전염병... 백성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 거예요. 이런 극한 상황에서 "황건적이 수십만이었다더라", "조조군이 백만이라더라" 하는 이야기는, 실제 병력 수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와 절망감의 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는 거죠. 마치 악몽을 꾸고 나서 "귀신이 집채만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건 실제 귀신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느낀 공포의 크기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 속 엄청난 병력 수치는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이자, "우리가 이렇게 힘든 시절을 견뎌냈다!"는 처절한 증언일지도 몰라요.

3.2. 영웅을 바라는 마음, 이야기를 키우다

힘든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리죠.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강력한 지도자를 말이에요. 삼국지 속 영웅들은 바로 그런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관우, 장비, 조자룡 같은 장수들이 수만 대군을 상대하며 무쌍을 펼치는 장면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줬을 거예요.

특히 제갈량처럼 지혜로써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인물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었겠죠. 비록 《연의》 속 제갈량의 활약 중 상당 부분이 꾸며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저런 지도자가 있다면!" 하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어요.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족보 같은 기록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영웅들의 이미지가 더욱 신격화되고 업적이 부풀려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상과 사회 정의가 이야기에 투영된 결과인 거죠.

결국, 삼국지 전쟁 이야기 속 허구는 당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내고 이상적인 가치를 찾으려 했던 마음이 담긴, 또 다른 형태의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맞다/틀리다'를 따지기보다 그 속에 담긴 시대정신과 문화적 의미를 읽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제가 파헤쳐 본 삼국지 전쟁 이야기, 재밌게 보셨나요?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건 좀 심한데?" 싶은 삼국지 속 '뻥'이나, "이건 진짜일까, 가짜일까?" 늘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댓글 주세요. 구독과 공감은 제가 글을 계속 쓰는 원동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