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지식인

미디어가 만든 허상 : 장군의 아들? 김두환은 조폭의 아버지다.

지식아재 2025. 6. 6. 02:27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
'장군의 아들'은 정치깡패였다

국회에 오물을 투척한 사건.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두환의 모습은 '협객', '낭만 주먹'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미디어 속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그가 마치 시대의 영웅이었던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곤 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스크린 뒤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오늘날에도 과거 조폭 활동을 했던 이들이 버젓이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해
'협객'을 자처하며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는 현상은
이러한 미디어의 허상이 만들어낸 위험한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본 글에서는 김두환의 삶을 통해
미디어가 어떻게 정치깡패를 영웅으로 둔갑시키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이 허상에 속지 말아야 하는지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장군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진실

김두환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입니다.

이 타이틀은 그에게 일종의 후광을 부여했고,
그의 폭력적인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그가 조선총독부 경시청의 비호 아래 조직된 '반도의용정신대'의 단장을 맡았을 때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상징성은 선전 효과를 노린 인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배경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이 과연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았는지입니다.

종로의 지배자, 그러나 협객은 아니었다

1935년경, 18세의 나이로 서울 종로 우미관 일대를 장악하며
김두환은 악명 높은 주먹으로 부상했습니다.

대중매체는 종종 그가 일본 야쿠자로부터 조선 상인을 보호한 '민족적 주먹패'였다고 묘사하지만,
실제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유흥가에서 상인들을 갈취하고 이권을 챙기는 등
현대적 조직폭력배와 유사한 활동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직적 폭력 및 이권 개입

그의 초기 활동은 이미 조직적인 폭력 및
이권 개입의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1940년에는 종로 2가 다방을 거점으로 폭력 행위를 일삼다 검거된 기록도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확인됩니다.

친일 부역 혐의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의 친일 부역 혐의입니다.

1943년 조직된 '경성특별지원청년단' (일명 '반도의용정신대')은
표면적으로는 불량배 교화 및 징용 기피자들의 피신처 역할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조선총독부 경시청이 전국의 골칫거리였던 깡패들을 관리하고 이용하기 위해 조직한
어용단체였다는 것이 다수의 자료에서 지적됩니다.

김두환은 이 단체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는 김두환에게 강제 징용을 요구했고,
그는 총독부와 협상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징용 대체 근로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체의 실질적 조직과 운영에는 전직 헌병이자 경찰이었던 장명원 등이 관여했습니다.

이 단체는 당시 대표적인 친일 단체였던 일진회, 시천교 등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장명원의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연결은
경찰이 아닌 김두환 측에서 먼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활동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이 자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혐의도 있었습니다.

또한, 징용 및 징역 기피자들을 구타, 고문하고
심지어 살해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단장이었던 장명원을 조사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두환 등 관련자들도 자동적으로 무혐의 처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기소유예 결정서에는 "명칭상 정신대일 뿐, 실상은 불량배를 교화하여
선량한 청년으로 육성하려고 한 것이며, 징용기피처가 되어
일제에게 주목받은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다"는 이유가 명시되었으나,
조사위원들 사이에서는 경시청과의 유착 및 자금 수수,
고문과 학대, 살인 가능성 등을 이유로 기소유예에 대한 반대 의견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행적은 그가 단순한 주먹패를 넘어,
일제 권력과 결탁하여 동족을 괴롭히고 이권을 챙긴
관제 폭력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반도의용정신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조직 운영 능력과 폭력 동원 경험을 제공했으며,
이는 해방 이후 정치깡패로 변신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44년,_반도의용정신대_시절
1944년,_반도의용정신대_시절

해방 후, 반공 투사로 변신한 정치깡패

해방은 김두환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습니다.

식민지 시기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에서 그는 해방 공간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우익 반공 투사로 변신하며 정치 폭력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과 백색 테러

해방 직후 김두환은 좌익 세력과의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우익 진영의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45년 12월 결성된 대한민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옹호파들이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와 노선을 달리하는 인사들, 특히 좌익 세력을 대상으로
암살, 습격, 납치, 고문 등 백색 테러를 자행한 조직이었습니다.

김두환은 이 대한민청에서 감찰부장 겸 별동대 대장을 맡아
실질적인 폭력 활동을 지휘했습니다.

대한민청의 명예회장으로는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이 추대되었고,
유진산이 회장을 맡는 등 당시 우익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관여했습니다.

대한민청 별동대는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고 회고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대한민주청년동맹
대한민주청년동맹
  • 노동운동 탄압: 1946년 9월 총파업 당시 대한민청은 경찰과 함께
    파업 노동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김두환 자신도 대한노동조합총연맹(대한노총)의 간부로 활동했는데,
    대한노총은 사회주의 계열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우익 성향의 노동단체였습니다.
  • 특히 용산 철도 파업 진압 과정에서는 대한민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1400여 명의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좌익 인사 및 단체 공격: 대한민청은 좌익 계열 신문사 습격 사건에도 관여했습니다.또한, 김두환은 자신의 회고에서 신탁통치 찬성대회 방해,
    남로당 전당대회 습격, 박헌영·신불출·심영·여운형 암살 미수 등을 주장했으며,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김규식과 김원봉을 살해 협박했다고도 밝혔습니다.
  • 반탁학련이 좌익 신문 《인민보》를 습격하고,
    서북청년회가 《현대일보》 등 좌익 신문사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한민청 역시 좌익 세력의 활동 거점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데 가담했습니다.

정진룡 살해 사건 (1947-1948)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은 1947년 발생한 정진룡 살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의 범죄 행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미군정 하 사법 시스템의 한계와 정치적 영향력을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입니다.

  • 사건 배경: 정진룡은 일제강점기부터 김두환과 알고 지낸 인물로,
    해방 이전에는 김두환과 함께 일본 경찰협회(Japanese Police Assistance Association)에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 미 육군 방첩대(CIC) 문서에 남아있습니다.해방 후 김두한은 우익으로 전향하여 대한민청을 이끌었고,
    정진룡은 좌익 계열인 조선청년전위대 및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며 두 사람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습니다.
  • CIC 기록에 따르면, 김두한이 정진룡의 권총을 빼앗아 무릎을 꿇린 사건도 있을 만큼
    둘 사이의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 이 문서는 두 사람을 "일제를 위한 합법적 테러리스트이자 정보제공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살해 과정: 1947년 4월 20일,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 단원들은
    서울에서 이승만 반대 유인물을 배포하던 정진룡을 포함한
    남로당원 13명을 납치했습니다.다른 남로당원 한 명이 탈출하여 이 사실을 CIC에 신고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 이들은 대한민청 본부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김두한은 격분하여 정진룡을 직접 살해했습니다.
  • 미군정의 수사 및 재판: 사건을 접수한 미 971 CIC 파견대가 즉각 수사에 착수하여
    김두한을 체포했습니다.1947년 6월 시작된 민간 법원에서의 1차 재판은 정치적 편향성으로 얼룩졌습니다.김두한의 자백과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대신 대한민청의 하급 단원 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미 육군 범죄수사국(CID)이 재수사를 담당했으나,
    통역관들이 "김두한을 보호하기 위해 증언을 왜곡하는" 등 어려움이 지속되었습니다.김두한 등은 서울 용산에 위치한 미 7사단 구금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3월 15일자 '미군정재판 군사위원회 명령 2번
    (Military Commission Order #2)'에 따르면 김두한에게는 교수형이,
    그의 공범 김영태, 신영균 등 15명에게는 종신형부터 20년형까지의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 이 결과에 분노한 미 군정장관 존 하지(John R. Hodge) 장군은
    군사위원회에 의한 재심을 명령했습니다.
  • CIC는 "재판 내내 판사와 배심원단은 피고인(김두한)이 이승만 지지자인 반면,
    구타당한 사람들은 최악의 좌익 말썽꾼들이라는 점을 상기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 김두한은 정진룡 살해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는데,
    CIC는 그가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자신의 범죄가 관대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으로 분석했습니다.
  • 감형 및 석방: 김두한의 사형 선고는 하지 장군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한 외신(mondaytimes.net)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승만은 김두한에게 특별 사면을 내렸고, 김두한은 석방되었다"고 명시적으로 보도했습니다.김두한은 석방 후 대한청년단 감찰부장 및 이승만의 개인 경호원이 되었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했습니다.
  • 미군 군사법정에서 살인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인물이
    이처럼 신속하게 풀려난 것은 신생 이승만 정부 내 정치적 인맥의 영향력과,
    우익 행동대원의 중범죄를 눈감아주려는 정권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 결정적으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 하의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김두한의 사건은 신생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고, 그는 곧 석방되었습니다.

미디어의 허상과 폭력의 대물림

김두환의 딸 김을동 씨가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부전여전'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녀가 부모의 모든 것을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폭력과 범죄로 얼룩진 과거를 미화하고,
심지어 그것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시도입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협객 김두환'의 이미지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의 삶은 폭력과 이권 다툼, 그리고 정치 권력에 기생한 범죄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진룡 살해 사건과 같이 명백한 살인 행위조차 정치적 비호 아래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그의 행보는
당시 사회의 법치주의가 얼마나 허술했으며,
폭력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용인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살인을 포함한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치적 비호 아래 장기적인 처벌을 면하고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될 수 있었던 그의 경력은,
국가 권력과 결탁한 폭력에 대한 면죄부가
한국 사회에 드리운 깊은 그림자를 상징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멋진 모습에 현혹되어 깡패를 동경하거나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기록된 역사와 자료는 김두환이 '낭만 주먹'이 아닌,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일삼은
'정치깡패'였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 너머의 진실을 직시하고,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속 허구 시리즈가 마음에 드신다면 

 

2025.06.01 - [문학 지식인] - 삼국지 검증! 뻥튀기 전쟁판 들여다 보기!(삼국지 분석 2탄)

 

삼국지 검증! 뻥튀기 전쟁판 들여다 보기!(삼국지 분석 2탄)

삼국지 대군, 진짜 그만큼? 팩트 체크 들어갑니다 이번 2탄은 삼국지의 전쟁편입니다. 어릴 때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해서 관도대전, 적벽대전 같은 이야기들을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그런데

djjjangs.tistory.com

2025.05.26 - [문학 지식인] - 명성황후?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민비와 민씨의 조선 수탈사

 

명성황후?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민비와 민씨의 조선 수탈사

명성황후 민씨일가 만행과 민중봉기지식아재SAY : "출근길에 명성황후 뮤지컬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명성황후? 이 네 글자는 저에게 아프게 느껴집니다. 무속에 나라 팔아먹은 여자, 권력유지를

djjjangs.tistory.com

 위의 글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