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사'가 된 일본인, 후세 다쓰지

2025. 6. 30. 10:33문학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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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로 알아보는 후세 다쓰지, 일본의 양심. 그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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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후세 다쓰지와 실존 후세 다쓰지의 모습.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은 일제강점기,

본 제국에 정면으로 맞섰던

아나키스트 박열의 삶을 강렬하게 그려내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박열만큼이나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준 또 한 명의 인물을

우리에게 각인시켰습니다.

바로 불꽃같은 저항가 박열의 곁을 묵묵히,

그리고 단단하게 지켰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대역죄인'의 변호를 기꺼이 맡아,

법정을 제국주의의 위선을 고발하는 투쟁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조국을 등지고

식민지 청년의 편에 서게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 부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영화 '박열'을 길잡이 삼아,

스크린 너머 그의 진짜 삶과 신념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보다 더 극적인,

시대의 불의에 맞선 한 인간의 위대한 양심에 관한 기록입니다.

 

영화 속 그 남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변호하다

영화 '박열'의 중심에는

일본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대역사건'으로

기소된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를 뒤흔든

이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곧 사회적 매장과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기피하던 이 사건에

후세 다쓰지는 주저 없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법률 대리인을 넘어,

두 저항가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두 사람이

조선의 전통 복장인 사모관대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재판받을 수 있도록 하여,

이 재판이 단순한 형사재판이 아닌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정치적 투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옥중 결혼 수속을

직접 대리하며 인간적인 연대를 나누었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의문사하자

그는 박열의 뜻에 따라 그녀의 유해를 수습해

한국으로 보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도왔습니다.

 

이는 법률적 조력을 넘어선,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과

연대의 표현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박열의 저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운명의 승리자 박열'이라는 책을 직접 집필하여

그들의 투쟁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스크린 너머의 삶: 평생을 바친 저항

영화 '박열'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결코

우연이나 일회성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신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저항의 시작: 제국의 검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生きべくんば民衆とともに、死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


이 한 문장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식민지 민중의 편에 섰던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의
묘비명이자 좌우명입니다.

저항의 씨앗: 유년 시절과 사상적 기반

1880년 미야기현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자유민권운동을 지지했던

지식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철학, 역사, 문학, 기독교 등

다방면에 걸친 인문학적 소양은
그에게

비판적 사고의 기틀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가 자라나던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때와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목도하며
그는 전쟁과 군국주의에 깊은 회의감을 품게 되었죠.

특히 그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후세는 동네 어른들이 조선인 학살 경험을
영웅담처럼 자랑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참혹한 비극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어른들과
이를 흥미롭게 듣는 주변 사람들.
이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은
그에게 제국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원초적 각성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경험 위에 그의 사상적 토대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만인의 평등한 사랑을 주장한 묵자의 '겸애(兼愛)' 사상과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박애주의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이 사상들은 국적이나 신분을 초월하여
억압받는 모든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강력한 윤리적 나침반이 되어주었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원래 성공이 보장된 엘리트 검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한 사건을 마주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어린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혼자 살아남은 어머니.

 

법에 따라

그는 이 어머니를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회가 구하지 못한 약자를

국가의 이름으로 처벌해야 하는

법의 비정함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을 "늑대와 같은 일"이라 비판하며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직했습니다.

 

이후 변호사가 된 그는

1920년,

"나는 앞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한 변호사로서,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겠다"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합니다.

박열을 변호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삶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을 위한 투쟁의 연대기

박열 사건 이전에도

그의 삶은 조선을 위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1911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관련자들의 변호를 맡아
    그들의 행위가 정당한 민족의 권리 주장임을 역설했습니다.

  •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유언비어로 무고한 조선인들이 학살되자,
    이를 "야만적인 학살"이라 규탄하며
    자신의 집에 조선인들을 피신시키고
    진상조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를 빼앗긴
    전남 나주 농민들을 위해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법정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조선 민중은
    "왔소, 왔소, 후세 선생, 우리 살리러 또 왔소"라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합니다.

양심의 대가와 시대를 초월한 유산

 

신념을 지키는 삶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평생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습니다.

신문지법,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했습니다.

 

무료 변론을 고집했던 탓에

그의 가족은 늘 가난에 시달렸고,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조선인 학생들이

오히려 그의 가족을 도울 정도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이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라며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해방된 조선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며,

민주주의 국가의 청사진을 담은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작성해

전달하는 것으로 마지막 헌신을 다했습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生きべくんば民衆とともに、死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

 

그의 묘비명이자 좌우명처럼,

후세 다쓰지는

1953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되살린 일본의 양심

 

영화 '박열'은

우리에게 잊혀가던 한 위대한 인물을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냈습니다.

 

후세 다쓰지는

단순히 한 사건의 변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국주의의 광기가 휩쓸던 시대,

국적과 민족을 넘어

오직 '인간의 양심'이라는

나침반을 따라 걸었던 실천가였습니다.

 

그의 삶은 국가가 저지르는 거대한 불의에

개인이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신념이 얼마나 큰 울림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 '박열'을 통해 다시 만난 후세 다쓰지.

그는 어두운 시대의 한 줄기 빛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일본의 양심'이자

시대를 초월한 도덕적 나침반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연도 주요 사건/활동 후세 다쓰지의 역할 의의 및 결과

 

<표: 후세 다쓰지의 활동 요약표 : 연도/ 사건/ 역활/결과>

1911 논문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 발표 저술가, 사상가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조선 독립운동 지지. 경찰의 조사를 받음.
1919 2.8 독립선언 사건 변호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을 변호하며 이들의 행위가 내란이 아닌 민족의 정당한 권리 주장임을 역설.
1923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활동가, 구호가, 조사관 일본 당국의 책임을 규탄하고, 진상조사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자신의 집에 조선인들을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구호 활동 전개.
1924 김지섭 의사 의거 사건 변호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하며 그의 행위가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
1925-1926 박열·가네코 후미코 대역사건 변호인, 후원자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기소된 두 사람을 변호하고, 옥중 결혼을 돕고, 가네코 후미코 사후 유해를 한국으로 보내는 등 법률적 조력을 넘어선 헌신.
1926 나주 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 분쟁 변호인, 조사관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동양척식의 토지 수탈에 맞선 농민들의 소송을 이끌며 식민지 경제 수탈에 정면으로 저항.
1946 '조선건국 헌법초안' 저술 입법 조언가 해방된 조선의 건국을 위해 자신의 법률 지식을 총동원하여 민주주의 국가의 청사진을 담은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전달.
1946-1953 재일조선인 인권 운동 변호인, 활동가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겨진 재일조선인들의 참정권 획득 운동, 한신교육투쟁 등 인권 신장을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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